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직도 그 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식후에 이별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무겁게 옮아간다.

─풍경 3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가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이혼을 의식화시키는 결혼이라는 제도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한다

─미망 BUS

 

 

그리하여 첫번째 먼지가 억겁의 윤회를 거쳐 두번째 먼지로 태어나듯이, 먼지와 먼지 사이에 코끼리와 태산과 바다의 시절이 있다 한들, 소멸 앞에 두렵지 않고 불멸 앞에 당혹지 않은 생은 없으리니.

─먼지 혹은 폐허 9